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구 황후 (문단 편집) == 실존 인물? ==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설이 우세하며, 진구 황후의 실존성을 입증할 그 어떤 교차검증된 기록도 없다.''' 일단 역사적 실제사건으로 보기에는 기록의 앞뒤가 전혀 맞지 않다. 먼저, 진구 황후가 신라로 쳐들어오자 [[신라]]의 파사매금(波沙寐錦)[* '파사'의 한자가 [[삼국사기]]와 다르지만, 어차피 신라나 일본이나 고대 인명/지명들은 대부분 [[고유어]] [[음차]]라서 그건 별로 상관이 없다.][* 매금은 [[광개토대왕릉비]]나 [[통일신라]]대 [[최치원]]이 지은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봉암사 지증대사비]]에도 나오는, 실제로 쓰였던 호칭이다. 자세한 내용은 [[법흥왕]] 항목 참조.]이란 왕이 인질을 보내며 항복했고, 그 인질은 이름이 미질기(微叱己, 혹은 미질허(微叱許)라고 기록되었다. 이들은 각각 [[파사 이사금]]과 [[미사흔]]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파사 이사금은 재위기간이 402년~417년이 되므로, 170년~269년에 활약한 진구 황후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이주갑인상|무려 2세기나 차이가 난다.]]''' 신라 정벌 기록의 근거를 따져보자. [[삼국사기]]의 [[파사 이사금]] 재위 당시 신라가 [[백제]]와 [[가야]]에게 침략받아 이를 물리쳤다는 기록은 있지만 일본이 공격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리고 미사흔은 '''[[눌지 마립간]]의 동생'''으로, 후대의 인물이다. 파사 다음 신라왕인 [[지마 이사금]] 때 [[가야]]에 패배하고 왜의 침입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그럼 이번에는 일본서기랑 안 맞게 된다. 또한 일본서기의 다른 기록에 보면 [[포로]]로 잡은 신라왕의 무릎 힘줄을 뽑아버리고 돌 위를 기어다니게 한 후 참수했다느니 하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249년/253년[* 249년은 삼국사기, 253년은 삼국유사 기록. 그나마 이건 거의 차이가 없다.] 왜군에게 죽었다는 [[석우로]]에 대한 기록이다. 즉, 하나도 맞는 게 없다. 다만 최근에 신석열 교수 등을 중심으로 신라 왕계 계보에도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즉 삼국사기 등을 신뢰하면 파사/석우로/마사흔은 동시대 혹은 비슷한 시대에 존재할 수 없는 인물들이지만, 박/석/김씨가 사실 순서대로 재위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에 존재했는데 순서대로 재위한 것처럼 꾸몄다는 이론에 따르면 저 세 인물들이 비슷한 시대에 존재할 수 있게 되며, 이를 이주갑인상으로 끌어올린뒤 전승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뒤죽박죽으로 섞였다고 한다면 말은 된다. 동시대에 존재한 군주들을 순서대로 즉위한 것처럼 꾸미는 사례는 이집트, 바빌로니아 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구한 역사왜곡 수법이며, 신라가 그런 왜곡을 안했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더 웃긴 점은 [[일본서기]]에서 [[신라구]]에게 피해를 받는 기록을 보면, 일본은 제대로 된 정식 군대가 있던 적이 없어 맨날 당한다느니, 그래도 [[정신승리법|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신국이니 앞으로는 안 오겠지]] 하며 자기위안만 하는 내용이 무더기로 나온다는 것. 그런데 이런 상황이면 최소한 정신적 위안용으로라도 진구 황후 얘기가 조금이라도 나올 만한데, '''안 나온다.''' 심지어 신라구 때문에 반신라 감정이 높아져 일본인들이 일본에 살던 신라인들을 공격했다는 기록도 있으면서, 진구 황후는 신화시대 기록 이후에는 '''안 나온다.''' 제3자의 시각인 [[중국]]의 기록과도 안 맞는다. 일단 중국의 기록 중에 종종 신라의 경우 일본보다 아래라고 적는 기록은 있지만 애매모호하며(이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임나일본부설]] 항목을 참조하기 바람), 무엇보다 위지 동이전 왜인전 기록을 비롯한 일본 고대사 관련 중국기록에 히미코는 나올망정 진구 황후에 대한 기록은 안 나온다. 더욱이 당시 히미코의 지배지 외에 다른 곳에 있는 나라에 대한 기록도 나오고 해당 소국들의 존재가 고고학적으로 입증되면서 단순 지방호족/반란세력 정도로 묘사하는 일본서기의 기록과도 안 맞는다. 더군다나 진구 황후 본인의 가족관계도 문제가 된다. 진구 황후의 어머니이자 오키나가노스쿠네노미코(息長宿禰王)의 아내인 카츠라기노타카누카히메(葛城高顙媛)는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천일창|아메노히보코]]의 손녀(6대손이라는 기록도 있는 듯)인데, 정작 진구 황후는 신의 계시를 받기 전에는 '''[[신라]]의 존재를 몰랐다고 기록되었다.''' 게다가 [[천일창]](아메노히보코) 설화는 [[한국]]의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와 구조가 거의 같아 출연 인물들을 동일시하거나 같은 계통 설화로 보는 학설도 있는데, 이 경우 연오랑 세오녀 설화가 기원후 2세기경의 이사금인 [[아달라 이사금]]의 통치기가 되어 진구 황후 집권기와 맞지 않는다는 문제가 생긴다. 거기다 이 때는 진구 황후의 모델이라는 주장이 있는 [[히미코]]가 신라와 중국 위나라에 사신을 보낸 시기. 더 꼬인다. 추가로 진구 황후의 시호는 타라시(足 혹은 帶) 계통인데, 이 계통 시호는 일본의 역사기록에서 7~8세기에 들어서야 나타난다. 한때 규슈 지역에서 발굴된 요시노가리 유적이 이와 관련되어 일본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으나, 정작 출토되는 유물 상당수는 반도계 유물들이 주루룩이었고, 결국 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이 중심이 되어 [[야요이 시대]]를 열었다는 일본의 기존 연구결과에서 크게 벗어나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한국에서 요시노가리 특별전을 열 때, 한국 학자들이 특별전의 부제로 '''일본 속의 고대 한국'''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요구하자 일본 학자들은 아무 군말없이 이를 받아들여 그대로 부제로 통과되어 버렸다.[[https://www.museum.go.kr/site/main/exhiSpecialTheme/view/current?exhiSpThemId=3418|#]].] 몇몇 일본 학자들은 [[야요이 시대]]보다 먼저 존재한 [[조몬 시대]]와 야요이 시대의 연관성에 대해 단절성보다는 연관성에 집중하여 어떻게든 일본 고대사의 상한선을 올려보려고 했지만, 두 문화는 주류 인종부터가 다른 데다 대륙(특히 한반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야요이 문화가 현대 일본인의 직계임은 연구하면 할수록 더 단단해지므로 이 설은 용도폐기된 상태다.[* 같은 이유로 한국 고대사에서는 [[기자동래설]]이 부정된다. 기자가 동래했음을 증명할 만한 중국계 청동기 유물들이 고조선 영역에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계 청동기 유물이라 해 봐야 기껏해야 청동 [[꺾창]]이나 중국식 청동거울, 중국식 거울을 모방한 본뜬거울이 전부. 그리고 이런 추세의 청동기 흐름은 일본 청동기 유적에서 복붙한 듯 그대로 따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